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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여름이 간다

긴 낮이 고개를 넘어갈 즈음 나는 대충 차려입고 밖으로 나간다. 한여름 밤에 묻혀 걷고 싶어서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치맛자락 펄럭이는 바람과 함께 걸으면 온전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여름이 슬슬 갈 준비를 하는 듯 엉덩이를 들썩인다. 떠나려는 여름이 야속하고 서운하다. 여름이 가면 낮이 줄어들고 밤이 빨리 온다. 밝음에서 어두움으로 들어가는, 좋아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느낌이다.     난 더위는 타지 않지만, 추위를 몹시 탄다. 더운 곳으로는 여행을 가도 추운 곳으로는 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많은 크루즈를 타고 이곳저곳 돌아다녔어도 알래스카는 가지 않았다. 알래스카라는 이름만 들어도 추위가 몰려오는 느낌이다   사춘기부터 나는 가을을 무척이나 탔다. 가을이 오는 것이 무서웠다. 화기애애한 모임이 끝나고 혼자 되어 어두움으로 들어가 눕는듯했다. 엄마는 가을이 오면 시작하는 내 우울함을 걱정했다. 용돈을 듬뿍 주며 친구 집에 가서 놀다 오라고 했다. 어찌 그리도 내 맘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처럼 나를 잘 아는지. 엄마와 살던 것보다 더 오래 산 남편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는지   “마누라는 쾌활 과다증이라니까.”   나라고 우울증이 없을까? 엄마는 내가 표현하지 않아도 내가 무엇을 먹고 싶어 하는지 성질을 왜 부리는지 다 알고 대처해줬다. 남편은 남의 편이라 당연히 그러려니 하며 살지만, 아쉽다.   오래전, 남편이 서울에 있는 모 대학 강의하러 가서 우리 친정아버지의 옥탑방에서 1년간 기생했다.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서 장인어른에 대한 고마움을 이야기하곤 한다. 남편은 생전 화내지 않고 상냥한 우리 아버지를 보며 영향을 받았는지 더러운 성질 줄어들고 변했다. 성질부리고 짜증 내봐야 자기 손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나대로 절대로 남편은 우리 엄마와 아버지 같지 않기에 기대하지 않고 살았다. 남편에 대한 기대가 없었기에 그와 오랜 세월 큰 싸움 없이 살아 아직도 붙어있나 보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여름 오래전 남편 우리 친정아버지 우리 엄마

2024-08-22

[이 아침에] 우리 이제 ‘심안’으로 만나자

그녀와 나는 오래전 교회에서 만났다. 아니 그보다 전 한국에서 먼저 만났다. 나를 보고 국어 선생님이셨죠? 하는 걸 보면 공부엔 별 관심 없었던 듯하다. 나는 가정과목을 가르쳤고 내 기억에도 그녀가 뚜렷이 남아있지 않으니 서로 그렇고 그런 학생과 선생 사이였나 보다.   그래도 이역만리에 이민 와서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그 인연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불가에서는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7000겁, 부모와 자식은 8000겁, 형제자매는 9000겁, 그리고 스승과 제자는 무려 1만 겁의 인연을 쌓아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부모나 형제자매의 인연보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몸은 부모로부터 받지만, 진정한 깨우침은 참된 스승의 올바른 가르침에서 비롯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감히 ‘스승과 제자’였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스승이란 호칭은 제자가 인정해야만 하는, 을이 인정해야 하는 갑의 호칭이어서 함부로 쓰긴 조심스러운 관계이다. 오히려 나는 내가 가르친 학생인 그녀가 존경스러웠다. 여고를 졸업하고 바로 미국에 와서 결혼한 그녀는 나보다 빨리 자녀를 두었다. 우리 아이가 중학생일 때 그녀의 아들은 고교졸업반으로 하버드에 입학해 온 교인의 축하를 받았다. 내 일처럼 기쁘고 대견했다. 미국에서의 자녀교육 선험자여서 유익한 여러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 후 교회의 분란으로 서로 교회가 달라져서 한동안 소식을 모르고 살았다.   얼마 전 동료 문인과 이야기하던 중에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그녀가 암 수술의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었다는 가슴이 덜컥하는 소식이었다. 팬데믹 기간 중의 일이었다고 한다. 나 살기 급급해 잊고 산 것이 미안하고 또 미안했지만 차마 연락을 못 했다. 무슨 위로를 해야 할까 생각나지 않고 남의 고통에 섣부른 참견을 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며칠 뒤 그녀가 먼저 전화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시간이 필요했다며 늦게 소식을 알려 미안하단다. 담담히 그간의 일을 말하는데 위로도 못 하고 울기만 했다. 어려운 시간을 견디고 이젠 현실을 수용했다고 한다. 남편이 조기 은퇴하여 극진히 보살펴주어 불편이 없다고도 했다.   “선생님과 타호에 함께 가서 종일 찬양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평생 그렇게 많은 찬양을 한 적이 없었거든요.”  오래전 남편의 가스펠 밴드에서 레이크 타호로 수련회 갈 때 초대했었는데 그때를 말하나 보다. 좋은 기억 속에 내가 남아있다니 다행스러웠다.   선생님을 한 번 봬야 하는데 미루다가 이렇게 되어서 죄송하다고도 했다. 한번 꼭 봬요. 남편이 데려다줘야 해서 시간을 맞춰보고 연락드릴게요.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이젠 큰 사람이 된 듯하다. 그녀가 스승이다. 우리 이제 육안보다 깊은 심안으로 만나자 J야! 이정아 / 수필가이 아침에 심안 8000겁 형제자매 오래전 교회 오래전 남편

2024-03-31

[삶의 뜨락에서] 경청(傾聽)의 힘

 요즈음은 십여 년 전에 떠난 남편이 많이 생각난다. 한평생 살면서 우리들의 대화는 그는 늘 듣는 쪽이었고 나는 늘 말하는 편이었다. 오랜 세월 늘 그렇게 지냈기에 당연지사로 매김질이 되어 그가 없는 지난 세월 자식들 앞에서도 그들의 대화를 듣기보다는 나를 앞세워 떠드는 형으로 군림하려 했다. 자식들과도 오랜 세월 떨어져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늘 같이 있고 보니, 그러지 않아도 나를 여러 면으로 챙겨주느라 힘든데 그들 속이 어떡하겠나 생각하니 이제부터라도 말하기보다 듣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경청의 의미를 생각했다.     경청이란 무엇인가! 한자로 풀이해보면 마음을 기울이고 들어준다는 말이다. 즉 남이 하는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거나 대강 듣거나 적당히 듣는 것은 대화를 잘하고 있다고 할 수 없고, 똑바로 듣고 정확히 듣고 철저히 들어야만 청(聽)은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이라 했다. 이처럼 경청이란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공감하는 능력이다.     얼마 전에 보내준 한 지인의 글이다. 제임스 버릴 엔젤은 1871년부터 1909년까지 38년간 미국 미시간대학의 총장을 지냈다. 보통 대학의 총장 자리는 상황에 따라 민감한 자리여서 압력 또한 많이 받는 곳이기에 오랜 기간 유임하는 것이 매우 힘든 자리지만 그는 직원들과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잘 조율시켰고, 모두를 만족하게 하며 학교를 운영했다. 그가 총장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을 때 기자들이 몰려와서 “그 어려운 자리를 오랫동안 유임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엔젤이 대답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팔보다 안테나를 더 높이 세웠던 것이 비결입니다” 했다. 말하기보다 듣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뜻이다. 아랫사람들에게 나팔처럼 계속 떠드는 것보다는 안테나가 전파를 잘 잡아내는 것처럼 사람들의 의견을 잘 경청하는 것이 유임의 비결이었던 것이다.     나는 오래전 남편이 의과대학을 다닐 때 그 학년 ‘총대(회장)’ 자리를 일 년 하기도 힘든데4년에 계속 유임하는 것을 보고 성격이 워낙 과묵하고 말이 많지 않은 성품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하면 그는 늘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안테나처럼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수용하며 조율하는 올바른 경청의 자세를 취하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올바른 경청이란 무조건적인 수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다 말을 잘 들은 후 좋은 의견을 잘 받아들이고 나쁜 의견은 그것이 왜 나쁜지 상대에게 이야기하고 서로 조율하는 것이 훌륭한 경청의 자세이기 때문에 바른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했다. 참고로 청(聽)자를 풀이하면 그 안에는 왕의 귀, 열 개의 눈, 하나의 마음이 있다 했다.     경청의 방법 1. 혼자서 대화를 독점하지 않는다 2. 상대방의 말을 가로채지 않는다 3. 이야기를 가로막지 않는다 4. 의견이 다르더라도 일단 수용한다 5. 말하는 순서를 지킨다 6. 논쟁에서는 먼저 상대방의 주장을 들어준다 7. 시선(eye-contact)을 맞춘다 8. 귀로만 듣지 말고 오감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경청한다.     우리가 한세상을 살면서 대인 관계를 이어나갈 때 이 경청의 힘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며 오늘도 한 수 배운다. 정순덕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경청 세월 자식들 오래전 남편 당연지사로 매김질

2022-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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